소녀혁명 우테나 론

 
마음대로 감상 (1)

   <소녀혁명 우테나>를 한 마디로 감상하기는 힘들 지도 모릅니다. 우선 <우테나>는 얼른 보기에는 <학창물>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배경은 오오토리 학원이라는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일단은 멀쩡한 중고등학교 법인 학원인 겁니다!) 교정이고, 인물들은 일단은 학생 신분이며, <우테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에피소드는 일차적으로는 학교 교정 내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왜 모두 <일단은>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걸까요. 그건 <우테나>에서 인물들이 수업을 받고 일상을 지내는 교실이라던가 기숙사가 단순한 학교 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들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얼핏 보기에 <우테나>는 수많은 미소년 미소녀들이 등장하여 서로 왕자님~ 공주님~ 하는 일반적인 순정 학원물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요. 학생회의 프린스인 학생회장 키류 토가에, 검도부 주장인 터프한 미남 사이온지, 앳띤 미소년 타입의 미키, 고고한 여왕님 쥬리 선배, 자존심 높고 완벽한(...완벽해 보이는) 공주님 스타일의 나나미, 수수께끼의 멍한 미소녀 히메미야 안시, 그리고 그들의 <세계>로 전학온 활발한 남장소녀 우테나, 덤으로 뒤에서 그들을 빙그레 지켜보며 어른의 냄새를 풍기는 왕자님(이사장) 아키오 씨까지. 아, 이것 정말 <그렇고 그런> 캠퍼스 사랑놀음이겠구나, 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낮에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체육 수업을 듣고 점심 도시락을 까먹으며 노닥거리는 평범한 학원으로 보이는 오오토리 학원에는 다른 이면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전학을 온 외부인 우테나는 <왕자님에게서 받은 반지>를 열쇠로 하여, 학원의 <금기>를 깨고 오오토리 학원이라는 세계의 또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듀얼리스트>와 <장미의 신부>와 <성>이 존재하는 결투 광장의 세계. 학생회 멤버들은 모두 사실은 <결투자의 자격>을 나타내는 반지인 <장미의 각인>을 끼고 결투하는 듀얼리스트들이었던 겁니다. 키류 토가, 사이온지, 쥬리, 미키, 나나미, 그들 모두 자기 자신만의 신념을 검으로 품고 서로 그 검을 맞대어 상대를 쓰러뜨리는 결투를 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결투에 이긴 자만이 <장미의 신부>인 히메미야 안시와 약혼을 하고, <디오스의 힘>이 잠든 성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던 탓입니다.

   <학원물>에서 갑자기 <결투물>이라니. 그러나 당황할 새도 없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테나>의 세계는 한겹 더 파고들어 버립니다. 바로 왕자와 마녀와 공주가 등장하는 동화, 혹은 우화의 세계 말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학원물에서는 안경을 낀 멍한 여자아이던 히메미야 안시는 결투 광장에서는 갑자기 왕자의 검을 품은 장미의 신부가 되고, 동화의 세계에까지 이르면 왕자를 봉인한 마녀로 그 정체가 속속들이 바뀌고 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테나>는 단순한 한 겹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 겹의 이야기로 파악해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약간 느끼한 로맨스가 있는 <학창물>에서, 장미와 검이 휘날리는 <결투물>, 그리고 우테나 이야기의 시초이자 결말이 되는 <우화물>까지 말입니다.
   처음에, 전학해 온 남장 소녀 우테나는 평범한 <학창물>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손가락에 낀 반지로 인해 <결투의 광장>으로 인도되었고 마침내는 봉인된 세계인 <우화의 세계>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마치 신화 속의 영웅이 지상에서는 하찮은 '아버지 없는 소년' 이었다가 여행을 떠나 하계와 천상계를 거쳐 마침내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검을 뽑는 우테나의 주문 같은 외침은 뭔가 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 세계를 혁명하기 위하여! "

    그럼 우테나가 혁명해야 했던 <세계>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테나는 평범한 <학창물>의 세계를 버리고 먼 옛날에 봉인되어 버린 우화의 세계까지 인도되어야 했던 걸까요. 아마 정답은 없을 겁니다. <우테나>는 정말 수많은 상징과 암시, 복선을 화면 이곳저곳에 캐릭터들의 대사에 소품 하나하나와 무대장치 곳곳에 깔아놓아서 한눈에 <이거다>라는 대답을 얻어낼 수가 없으니까요. 다른 훌륭한 작품들이 모두 그렇듯 자기 해석력을 갖고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다른 <우테나 이야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우테나>의 세계의 매력이고요.

   일단 사이암의 어설픈 감상문은 <우테나>가 3층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각각의 모든 캐릭터들이 각 층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밑바탕에서 출발해 보겠습니다. 도중에 길을 잃을 지도 모르지만 <장미의 각인>이 인도해 주리라고 믿습니다. (웃음)

: 1층 - 학창물 - 표면적인 이야기 :


    겉보기만으로는 일단 "주요 캐릭터들이 교복 대신 이상한 제복을 입고 있다, 선생이나 외부인, 어른의 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학생들만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만 빼면 여느 순정 학창물과 대동소이합니다.

  텐죠 우테나라는 소녀가 오오토리 학원에 전학을 온다, 그 소녀는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어떤 기억 때문에 왕자님을 동경하게 되고, 왕자님과 조금이라도 비슷해지기 위해 남자아이의
교복을 입는 괴짜다, (여기까지는 정말로 순정만화가 치호 사이토의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낯선 새 세계에 들어선 우테나는 친구를 사귀고 적대자도 생기고 서서히 새 학교에
적응을 해 간다, 뭔가 비밀이 많은 학생회와 협력도 하고 적대도 해 가며 왕따 소녀 히메미야
안시와 친구가 되기 위해 애쓴다, 알고보니 학생회 사람들도 사연이 많더라(시스콘에 브라콘,
L 에 소꿉친구에 대한 열등감에 기타 등등...), 그런 여러 에피소드들을 겪으며 학교
이사장이라는 근사한 오라버니를 만난다, 열네살 소녀 가슴 두근두근...

   그리하여 순정만화의 귀감이 될 법한 적극적이고 밝고 쾌활한 소녀 우테나는 어린 시절 왕자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강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마음을 닫은 소녀 안시와 진정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 라는 순조롭고도 행복한 결말.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이 단순한 이야기 역시 심층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심층에 묻어두기 마련입니다. 표면적 이야기를 전달하는 스토리 텔링과 주제를 직접 강박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니까요. 말하자면 <학창물 속에서 소녀 우테나의 성장담>은 진짜 이 이야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둘러싼 훌륭한 당의정이자 보는 사람이 효과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해 주는 설정이기도 한 겁니다.

: 2층 - 결투물 - 투쟁하는 의미들 :


     우테나는 마치 토끼를 따라 굴 속에 뛰어든 앨리스와도 같습니다. <왕자님이 좋으니까 내가 왕자님처럼 되는 거야>라는 단순무식하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지닌 우테나가 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은 결투 광장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지요.

     앨리스는 토끼가 옷을 입은 채 말을 하고, 트럼프 속의 여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세계에 당황스러워 합니다. 자신이 원래 알고 있던 사물의 의미와 관념이 이 토끼굴 밑에서는 전혀 새롭게 해석되고 짝지워졌기 때문이지요. 사실 토끼나 트럼프나 약병이나 커다란 계란이나 고양이가 뭐 대수겠습니까. 그건 원래 있던 세계에서도 지겹도록 본 것인데요. 문제는 그것들이 자신이 알던 그것들과 너무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겁니다.

  
    그렇죠. 안경을 쓴 멍한 소녀 히메미야 안시나 학생회 멤버들이나 다 늘상 보던 그 얼굴에 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그들은 다른 역할을 합니다. 안시는 붉은 드레스와 검과 함께 <장미의 신부>가 되고, 사이온지나 키류 토가는 그녀를 둘러싼 <듀얼리스트>가 되는 겁니다. 그에 따라 우테나의 역할도 바뀌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얼떨결에 멋도 모르고 토끼굴에 뛰어든 우테나는 미우나 고우나 <장미의 신부>의 새 약혼자가 되어 버립니다. 난 여자야! 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이미 쏟아진 물. 한번 이쪽 세계의 의미를 알아버린 이상 예전의 1차적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지요. (묵념)

     오오토리 학원이라는, 평범한 중고등학교로 보였던 세계도 결투 광장을 중심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하늘 높이 거꾸로 선 성이 떠 있고, 그 성 안에는 디오스라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있으며, 듀얼리스트들은 원래 자신이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디오스의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겁니다. 누군가는 영원한 것을 찾기 위해 싸우고, 누군가는 기적을 부정하기 위해 싸우고(사실은 모순적으로 기적이 증명되기를 바라면서), 누군가는 빛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싸웁니다. 1차적 세계, 즉 학원물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브라콘, 시스콘, 변태 등등으로 치부되던 것은 관념적 살을 입고 그 사람의 존재 의미가 되는 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철없이 여동생과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미키에게 그 시절은 단순히 <시스콘의 계절>만은 아니었다는 것이겠지요. 미키에게 그 추억은 자신의 완전성이 발휘되던 낙원의 시간, 신의 정원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나날을 상징하는 겁니다. 그게 <빛나는 것>이라는 키워드로 미키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고, 미키는 낙원에서 추방된 순교자처럼 그것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말이지요. 싸워서 이길 수만 있다면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싸웠고, 그래서 졌습니다.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미키는 어쨌든 진실을 알게 되었는 지도 모릅니다. 사실 자신이 꿈꾸던 그런 낙원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여동생 코즈에가 줄곧 미키를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미키도 그걸 깨달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가혹하지요. 자신에게 소중한 기억, 꿈, 소망이 깨어진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우테나는 자신의 의미를 건 듀얼리스트들과 결투를 합니다. 그건 단순히 소년소녀들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알을 깨는 것>입니다. 모든 듀얼리스트들은 미키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추억이나 이루고 싶은 소망을 하나씩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얽매여 있고, 그 추억과 소망은 악몽처럼 그들의 성장을 막고 있던 겁니다. 진실이 아니었으니까요. 쭉 자신을 속이고 있던 쥬리 씨나, 헛된 꿈을 꾸고 있던 사이온지나 마찬가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두던 그 알을 깨야 했습니다. 다른 말로는 관에서 나와야 했지요. 병아리는 알에서 나오지 못하면 죽습니다. 세계인 알이 곧 관이 되고 무덤이 되니까요. 그래서 알은 세계이자 동시에 관입니다.

     그런 의미로 결투의 광장은 성장의 관문을 상징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단순한 소년소녀의 사춘기만이 아닌 삶,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나 할까요. 차례차례 다른 듀얼리스트들을 무찌르며, 우테나는 그들의 유아고착적인 추억과 소망을 부수어 버립니다. 그 결과로 듀얼리스트들이 알을 깨게 될 지, 부서진 알의 조각과 더불어 성장의 단계에서 퇴장하게 될 지는 모릅니다. (아마도 미카게는 퇴장당한 경우겠지요...) 어떤 식으로든 우테나와 결투장에서 칼을 맞댄 자는 조금씩 변합니다. 성장을 하거나, 충격을 받고 퇴행하거나, 다른 길을 찾거나... 씁쓸하고도 잔혹한 결투의 대가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테나는 강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된 꿈을 겨루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신념이 강하고 의지가 굳어야 했던 겁니다. 그것은 곧 그녀가 <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모범, 혹은 구원자인 강력한 존재니까요. 우테나는 자신이 쓰러뜨린 모든 사람들의 신념, 소원을 대신 짊어지고 그들 대신 디오스의 성에 가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테나 앞에서 주저앉아 버린 이들에게 속죄하고 구원할 유일한 길이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우테나>의 이야기는 우화,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 3층 - 우화 - 진실과 혁명 :


     2층에서 결투가 삶의 투쟁을 의미했다면, 3층의 우화는 <우테나> 자체가 모태로 삼고 있는 순정만화와 동화를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사실 순정만화의 모태가 무엇이겠습니까. 공주님이 잘 나가는 왕자님을 만나 왕자님은 세상을 구원하고 공주님을 구해내어 둘이 행복한 결합을 이룬다는 로열 웨딩 동화 아니겠습니까. 현대의 순정만화야 여러 바리에이션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기저가 되는 근간을 보자면 역시 백설공주-신데렐라-잠자는 숲속의 미녀 류의 동화일 겁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랑받던 그 로열 웨딩 동화물은 현대에 와서 여성들에게 맹비난을 받는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동화를 각색한 것에 불과한 순정만화도 마찬가지고요.
    대체 공주님이 뭔데? 왕자님이 뭔데? 얼굴 반반하고 재주라고는 예쁘게 머리 빗고 앉아 수 놓고 노래부르는 것밖에 없는 참한 공주님이 가냘프게 쓰러지면, 멀리서 백마 탄 왕자님이 잘도 냄새맡고 달려와서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상태에서도 폴 인 러브, 가엾은 공주님의 가시덤불이니 사악한 계모니 알아서 척척 해치워주고 덥석 안아서 사랑의 보금자리로 데려간다... 라니. 그 심층 의미라거나 융 적인 상징은 차치하고서라도 찜찜한 것은 사실이죠.

     그래서 순정 학창물을 모태로 한 우테나가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모든 모순을 잉태한 동화/우화였던 겁니다. 그러나 이 3번째 층의 구조는 이야기 전체에서 대놓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혹은 상징적인 매개물을 통해서만 근근히 존재를 암시하다가, 최종의 두 화에서 겉에 살짝 입혀두었던 <순정 학창물>과 그야말로 극적인 대반전을 이루며 나타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동화 속의 공주님은 무능한 백치입니다. 공주님답게 요리도 못해, 수학문제도 못 풀어, 재주라고는 꽃에 물 주는 취미 뿐, 정말로 손에 물 한번 안 묻힌 채 백치미를 자랑하고, <약혼해라>라고 하면 상대가 누구든 왕자가 될 가능성만 있다 하면 방긋 웃으며 <저는 당신의 꽃입니다>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공주님은 왕자의 창부인데다가 다른 여자아이들이 보기에는 왕자님을 독차지한 눈꼴 신 마녀지요. <저게 감히 우리 왕자님을!>. 많이 들어본 대사 아닙니까. 사이온지나 키류 토가 손에서 이리저리 졸졸 끌려다니는 히메미야 안시에게 다른 여자아이들이 화가 나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안시는 장미의 신부다. 엔게지한 사람의 뜻에만 따르는 거다>. 안시를 마음대로 물건처럼 다루며 사이온지와 토가가 하는 말입니다. 안시가 입은 붉은 드레스는 타락한 공주, 마녀나 창부의 표식처럼 보입니다.(우테나가 입는 장미의 신부 드레스는 흰 드레스였죠...)

     그렇다면 왜 모두 안시를 손에 넣어 약혼하려 하는 건지요. 그건 <공주>란 존재가 역시나 <왕자>와 약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하면 이미 공주가 아니라 왕비이고, 왕비가 타락하면 계모나 마녀가 되는 탓에 반드시 <약혼>이어야 합니다.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본 공식 같지 않나요? 순정만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결혼으로 끝맺는 경우는 많지 않지요. 사랑이 맺어지거나 깨어지는 <약혼> 상태에서 결말이 납니다. 그건 역시 미성숙의 증거이며 왕과 왕비가 되지 못한 왕자와 공주는 끊임없이 <결투하는 자>이기 때문이겠지요. 왕과 왕비가 되면 결투하여 힘을 손에 넣을 필요가 없으며, 남아있는 건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며 죽는 길 뿐이니까요.

  
   원점으로 와서 다시 말하자면, <왕자의 약혼녀>인 안시와 약혼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왕자의 후계자>임을 증명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 기를 쓰고 안시를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왕자의 후계자임을 증명받는다는 건? 그건 디오스의 힘을 손에 넣는다는 뜻. 디오스의 힘은 세계를 혁명하는 힘이며, 즉 왕자가 지닌 구원과 파멸의 힘입니다. 왕자는 자기 뜻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에라이, 이 썩어빠진 더러운 세상, 내 맘대로 살고 말 테다! 말은 쉽지만 어디 뜻대로 됩니까.
    디오스의 힘은 즉 소년소녀들이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일 겁니다. 자기 뜻대로, 순수하게, 소망과 신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결투에서 다른 사람에게 깨지지 않고 그대로 소중히 자기 자신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지요. 우테나는 그 당당한 모습을 어린 시절 반지를 준 왕자에게서 발견했고, 쭉 그 왕자처럼 살고 싶어서 가짜 왕자 행세를 했던 겁니다.

  
    그러면 또다시 원점으로 와서. 그래, 안시가 한때 공주였다 치자. 그러나 이제 안시는 타락한 공주라서 마녀 혹은 창부인데 어떻게 그런 안시가 왕자의 힘을 감추고 있다는 거지?


     이것은 아마 동화를 넘어선 신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그것 또한 현대에서 여성들의 맹비난을 받는 개념입니다. 프로이트의 머릿속은 썩었네, 빅토리아 시대의 구닥다릴세, 말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남자아이들은 아버지를 거세해 버리고 어머니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에 머릿속이 꽉 차 있다는 소리지요.

     디오스의 힘은 봉인당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을 구원하는 왕자님>은 거세당했던 겁니다. 누군가가 낫을 휘둘러 용감한 왕자님에게서 힘을 빼앗았지요. 그런데 거세한 사람은 왕자님의 아들, 혹은 오이디푸스나 크로노스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안시였지요.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한 건 아들 크로노스의 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라노스의 거세를 꾸미고 부추긴 것은 우라노스의 어머니인 가이아 여신과 아내인 레아였던 겁니다. 레아는 아내인 동시에 여동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왕자님을 거세한 것은 왕자님의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여동생인 존재. 그리고 그건 히메미야 안시입니다. 고대의 여신은 돌고 도는 순환적인 존재라서 영웅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연인이기도 하고 여동생이나 누나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왕자님을 거세한 공주님은 결국 마녀나 창부로 타락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마녀와 왕자에 대한 동화는 두 가지였습니다. 왕자님의 여동생이 자기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시기해 왕자님을 가둬버렸다는 것, 그리고 왕자님을 너무나도 사랑한 연인 소녀가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 그를 가둬버렸다는 것. 두 케이스 모두 소녀는 마녀가 되어버렸습니다.

  
    공주가 아니면 마녀라니, 잔혹한 운명 아닙니까. 동화 속의 소녀들, 순정만화 속의 소녀들은 이 잔혹한 운명 속에서 윤회를 거듭해 온 겁니다. 우테나라는 남장 소녀를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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